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버트런드 러셀, '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그의 역사 책은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유행어가 있다. 처음 들으면 어처구나가 없어서 웃게 되는 말이지만, 그 말을 곱씹어보면 웃고 있는 그 누구도 "내가 누구고 여기는 어디인지"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물음은 인문학의 최대 과제이며, 지금까지 수많은 시간에 걸쳐 논의되고 검토되었지만 아직도 명확한 해답은 없다. 어쩌면 해답을 바라는 것 자체가 이상해보이기까지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들이 시간이라는 축을 기준으로 정렬되는데 이를 역사라고 부른다. 대개의 역사 지식들은 딱딱하다. 인류가 지금까지 맞닥뜨린 수많은 사건에 대한 자극과 반응들이 큰 통찰 없이 나열된 지식으로 머릿 속에 들어온다. 그렇게 재구성된 역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우리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분하고 딱딱할 뿐더러, 현재와 다른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역사 읽기는 즐거워야 한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읽는가? 그리고 역사가들은 역사를 왜 쓰는가?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든 역사적 상황과 이어져 있으며, 우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벌어지는 또 다른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고 즐기며 배울 수 있다. 러셀에게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났었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역사를 망원경으로도, 또 현미경으로도 이리 저리 들여다보며 즐기고 있다. 바로 거시적인 관점의 '역사의 발전 과정과 거동 특성', 그리고 미시적 관점의 '인물 연구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1) 거시적 관점
러셀은 군사사와 경제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역사의 발전 과정 상에 그 흐름을 이끌었던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서양의 대포와 내셔널리즘의 등장, 그리고 공업화와 군사대국화 사이의 관계, 도시와 시골 사이의 힘겨루기, 문화 특성과 경제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러셀은 역사 그 자체를 초이론적으로 통합시키는 일련의 '역사철학적 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이렇게 특정한 요소를 통해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부분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특정한 요소'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러셀 그 자신이 제시한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역사를 바꾼 요소보다는 그러한 요소가 어떻게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대포는 어떠한 맥락에서 등장하게 되었으며, 전투 방식을 바꾼 것은 그 파괴력 때문이었을까? 또 높은 공업 능력이 언제나 전세계적인 군사력 장악을 가져올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구대륙에는 바퀴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대륙은 그 위대한 발명품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아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면, 역사의 효용은 너무나도 줄어든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요소가 있다는 것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 앞으로의 변화를 이끌 새로운 요소가 어디에서 창출될 것인지에 대한 통찰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2) 미시적 관점
러셀이 또한 주목하는 것은 인물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개인을 이해하고 인간 본성까지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를 이끈 위인들의 삶에 주목했고, 그들이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각 개인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논의는 한 사람이 역사의 흐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재조명하고, 역사를 수많은 사람들이 숨쉬는 삶으로 돌려놓았다.
필자는 이러한 러셀의 논의에 크게 공감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서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 기술의 발전 등 인간 외부적인 요소가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 대응하고 발전하는 한 사람의 인간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한 사람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큰 교훈으로 들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지금도 변화를 잉태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발전을 원한다면 한 사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로 이어지고, 그것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될 때 바로 한 사람에서부터 역사의 흐름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3) 역사를 보는 또 다른 방법들
러셀은 이러한 거시적, 미시적 관점과 함께 역사를 읽는 재미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직학적 관점에서 규제와 자유 사이의 균형을 살펴보거나 일관된 전체와 예외적인 개인을 발견하는 방법, 긴 시간의 흐름에서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방법, 그리고 영속적인 것을 분별하는 방법 등. 러셀의 이러한 역사 읽기는 우리가 역사를 사실의 단편적인 나열로서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이유를 물을 수 있는 커다란 틀로서 인식하자는 것으로 풀이된다.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겨 놓은 상황과 선택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어떠한 사건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만 당대에는 그러한 결과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사건들도 있었다. 우리는 역사를 읽으면서 현재의 상황에 이를 그대로 투영해볼 수 있다. 역사를 읽으면 우리의 삶 속에 거시적인 추세와 미시적인 움직임들이 보이고, 어떠한 움직임은 커다란 변화를 창출해갈 것이다. 그것이 되도록이면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러셀의 바람이다.
러셀은 자신을 아마추어 역사가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직관과 관점은 놀랍게도 역사의 본질적 측면에 맞닿아 있었다. 그는 역사의 존재 이유부터 역사를 읽고 쓰고 가르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역사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제한적이었지만 모든 역사적인 상황이 현재였다. 우리는 현재에서 살았으며, 현재에서 살아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현재에 살 것이다. 그 커다란 흐름을 창출하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