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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권력의 분립은 시민의 자유를 담보하는가?


몽테스키외의 뛰어난 저작, 법의 정신은 사실 법학에 문외한인 필자에게 법을 이루는 체계와 그 본질, 그리고 이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법을 '사물의 본질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정의하며 존재 자체가 법 체계를 안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법은 균일하며 항구적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삼권 분립을 통해 서로의 권력을 견제할 때에만 인간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은 현대 사회에까지도 그대로 통용되는 저자의 뛰어난 통찰이었다.지만 이 저서는 너무나 방대해서 일독만으로는 책의 전체적인 부분을 비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공화 정체에 한해서 전반을 고찰해볼 것이며, 이를 위해 각 정체에 대한 몽테스키외의 인식을 분석해볼 것이다.


공화 정체는 우리 나라의 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근간으로 하고 있다. 몽테스키외는 공화정체를 '민주정체'와 '귀족정체'로 구분하였고, 인민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인 '투표권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인민의 대리자인 '행정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서 인민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에 훌륭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의 개인적인 자질을 검증하기 보다 그러한 대표자를 선출하는법칙에 주목했다. 그래서 투표권의 범위와 당위성에도 마땅한 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항상 인민은 적합한 대표자를 선출하는가? 저자는 인민이 사람의 장점을 판별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아테네인과 로마인들의 사례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에서는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계급이 정해져 있었으며, 실제로 대표자로 선출되기 위한 차별화된 고등 교육을 받았다. 즉, 사람들이 판별할 수 있을만한 좁은 범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들은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적합한 자를 찾아 대표자로 선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등 교육이 보편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몽테스키외가 말한 인민들 중에서 조차도 대표자가 선출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인민은 선거에 참여하는 데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선출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몽테스키외의 전제가 흔들리는 지점이다. 이렇게 된다면 인민들 중에서도 충분히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이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하고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H.A.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의사결정은 모든 부분을 빈틈없이 고려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늘 해오던 익숙한 방식을 거쳐서 그정도면 됐다는 수준에서 마무리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대안의 갯수는 너무나 많은데 반해 우리의 인지적 자원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이렇게 제한된다고 한다면,  법적 체계와 절차가 완비된다고 할지라도  마땅한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방식에 정당성이 결여될 수 있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공화정체의 법적 체계와 함께 정체에 대한 '교육' 또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대표자를 뽑는 인민의 훌륭한 능력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현재의 정치 구도에서도 잘못된 위정자가 선출되거나 대표자를 아예 선출하지 못하는 등의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 정신에 대한 마땅한 교육과 정신 계승이 없는 오늘날의 사회는 몽테스키외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전제에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즉, 민주주의의 구성원들은 '모든 인민에게서 동일한 주권이 발생한다라고 하는 점'을 단순한 구호로 받아들이거나 아예 망각하고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 자체가 사물의 본질에서 '내발'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인민들은 현실에서 이를 제대로 표출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에서도 권력 기구들의 조정과정을 너무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이 한쪽으로 집중되게 되면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저해하게 되므로 이 세가지 권력을 분리시켜야 하며, 이들이 서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을 때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고 정치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 관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기구 사이들의 조정과정에서도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권력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집중될 수 있고 이 때문에 정치적 자유가 제한받을 수 있다.

몽테스키외가 지적한 권력의 분립은 법치체계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구조이다. 이러한 힘은 각자의 권리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충돌해야만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구조 자체'보다는 공동선을 위해 서로를 견제하고 발전해나가는 권력의 동적인 '메커니즘'을 통해서 정치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몽테스키외는 권력을 분립시켜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를 강조했기 때문에 오히려 구조적인 논의에만 그쳐버린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회는 권력의 구조적인 균형에만 매달려 그 속에 담긴 '법의 정신'을 망각해버렸기 때문에 세계 대전이라는 비참학 역사를 만들었고, 시민들이 피를 흘려가며 이룩한 민주주의가 군사력과 자본력에 의해 다시금 위협당하고 있다. 그렇기에 표면적으로는 현대의 법 체계가 권력의 분립을 잘 구현하고 있으면서도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승자들만이 독식하는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몽테스키외가 공화 정체에서 법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동력으로 이야기한 '덕성'이 어떠한 맥락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덕성이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매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개념은 매우 동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개념으로 몽테스키외가 공화 정체의 동력을 지적한 것이라면, 우리가 진정한 법의 정신을 구현해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덕성의 계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무관심과 부패의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현대는 가장 발달된 법치 체계를 기반으로 구현된 세계이다. 정말 '만민법'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수많은 국가들 사이에 제정된 국제법이 있고, 세계 인권선언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점점 더 자본력과 군사력은 집중되어가고 있으며 주권에 대한, 또 법의 정신에 대한 개인의 인식은 무뎌져가고 있다. 이제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법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