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도록 아름답다. 사실 오래전에 사두고도 읽게 되지 않았던 책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지냈을뿐더러, 어딘지 모르게 명랑소설의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소설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인생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데도.) 어쩌면 내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 있기만 했던 이 책을 만난 것 자체가 일종의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추석 당일, 할머니 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나미야 잡화점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 폐가로 가자는 말을 처음 꺼낸 건 쇼타였다. 아주 괜찮은 헌 집이 있다고 했다."
이 한 문장으로 우리는 동네 친구들 같은 세 주인공ㅡ쇼타, 아쓰야, 고헤이ㅡ과 함께 나미야 잡화점의 세계로 함께 들어간다. 고민(나야미)을 해결해주는 잡화점. 이 잡화점의 주인이었던 나야미 유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이지만, 할아버지에게 고민을 의뢰하는 편지가 주인공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한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답변을 적어 뒷문 우유상자에 넣어두면, 바로 다시 그에 대한 답장이 셔터 우편함 속으로 툭 떨어진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만들어 낸 시간의 문.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하지만, 아무튼 틀림없는 얘기예요.
마지막까지 꼭 그걸 믿어주세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어야 합니다.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나미야 잡화점 드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허구의 세계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그렇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세계를 통해 본 세상은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다. 작가가 밝혔듯이 사회적으로 무능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주인공들이 쓴 편지에 상담자들은 감동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들의 의도와 반하더라도, 단지 고민을 들어주고 그 사람을 생각해주기만 하는 것으로도 사람은 크게 변한다. 나미야 할아버지도 그의 편지가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정말 궁금해했다. 그의 충고를 따른 사람도, 따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는 모두 웃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상담자 중에는 답장을 받은 뒤에 다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많아. 답장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지."
그냥 말을 들어주었을 뿐인데, 잠시 고민해보았을 뿐인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경험이 있다. 설령 그러한 '들어주기'가 뾰족한 해결 방법을 얻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고민의 무게를 함께 '들어주는' 것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한 편의 소설에 수많은 사람이 감동한 이유는 소설의 소재가 재미있고 구성이 독특하다는 점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말 못 할 고민을 갖고 있거나 가져봤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과 끝에서 예기치 못한 스토리를 맞닥뜨릴 때가 되면, 이 작가는 정말 굉장하다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다른 소설도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9월 13일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야미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까요. 기탄없는 의견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처럼 가게의 셔터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이 2019년 9월 13일이었다. 나미야 잡화점이 부활한ㅡ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ㅡ날은 2012년 9월 13일이다. 소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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